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의 무기 (문단 편집) === [[조선]]시대의 무기 === [include(틀:조선의 무기)] 조선 시대는 활을 애용한 시대였다. 조총의 전래 이전까지 중국, 일본과 비교해 궁병의 비율이 매우 높았으며 조선 내부에서 타국과 비교해 우리가 활을 잘 쏜다고 자부하는 문서가 많이 발견된다. 조선 전기의 화약 무기는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에 대해 신무기이자 위력이 컸던 대표적인 병기였다. 조선 시대의 화약 무기는 한편에서는 실전을 대비하기 위한 주요 병기로 개발에 적극적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주변 민족에 대한 금비책[* 화약을 만들고 다루는 기술은 철저하게 기밀로 붙여졌다. 일본은 16세기 중반 명종 대에 이르러 화약 제조 기술을 얻게 된다.]으로 인해서 화약 무기 발달에 크게 저해되는 요인으로 작용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조선에서 유황과 염초를 확보하기가 쉽지가 않아서 조선은 화약의 재료를 확보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염초의 경우 명에게서 수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명이 별로 팔고 싶어하지 않았고 유황의 경우 일본에서 상당한 양을 수입해왔다. 염초의 경우 생산량 자체도 많지 않은데 소모량이 적지 않아서 세종 시기에 염초 생산을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 9월 19일 병인 4번째 기사], 생산량이 부족하여 명의 사신에게 염초의 생산량이 부족함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 당시 염초의 생산량은 연간 1천 근이 안 되었다고.[* 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 12월 24일 을묘 5번째 기사] 문종 때도 신하들이 염초는 화포에 사용하는 거지 채옥을 굽는 데 낭비하면 안 된다고 상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 3월 5일 기유 2번째 기사] 선조 때에도 염초를 굽는 방법을 확보하기 위하여 생포한 왜인에게 그 방법을 알아내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선조실록 36권, 선조 26년 3월 11일 병인 6번째 기사] 이런 노력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서 화약 생산량은 제법 증가하였다. 재료의 경우도 현종 무렵에는 유황 광산을 개발하여 자체적으로도 수급이 가능해졌다.[*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1월 3일 신묘 1번째 기사, 현종개수실록 22권, 현종 11년 1월 3일 신묘 1번째 기사] 한편 이렇게 화약 무기를 사용하다보니 사고가 안 생길 리가 없어서 화약고 화재 사건도 종종 발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실록에 기록된 최초의 화약고 화재는 세종 시기로 화약고에 화재가 발생하여 22명이 피해를 입었고 그중 11명은 치료를 받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세종실록 118권, 세종 29년 10월 3일 신유 2번째 기사] 그러나 중기까지는 (기록상으로는) 별로 언급이 없다가 영조 시절부터 슬슬 본격적으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영조 4년에 화약 4,213근(2,528kg)이 소실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영조실록 15권, 영조 4년 1월 27일 무인 4번째 기사] 순조 7년에 자모산성의 화약고 화재로 화약 38,470근(23,082kg)이 소실되고[* 순조실록 10권, 순조 7년 4월 20일 임진 2번째 기사] 순조 19년에는 어영청 남소영의 화약고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화약 93,280근(55,968kg)이 소실되고 20명이 사망하였다.[*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 3월 28일 경신 1번째 기사] 그 외에도 화약을 훔쳐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현종 3년에 임창혁이라는 자가 화약을 빼돌리가 걸려서 효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헌종실록 4권, 헌종 3년 8월 19일 갑자 1번째 기사] 그러나 그중 가장 큰 스케일의 도둑은 정조 1년에 발생했는데 도난당한 화약의 양이 7,000여 근(...)이나 되었다.[*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2월 7일 계묘 2번째 기사] 새로운 화약 무기의 장점은 관통력과 사거리가 길어서 전투에 있어서 살상력이 높았으며, 또한 병사들이 단기간의 훈련에 의해서 어느 정도 사격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화약 및 화기의 제조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으며, 발사 시간의 지연 및 우천시의 발사 곤란 등은 문제점이 되었다. 이리하여 이를 보완시켜 줄 재래의 일반 무기도 전투에 병행하여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화약 무기와 상보 관계가 되었던 일반 무기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궁시류였다. 성능이 우수한 궁시류를 제조하는 데는 재료의 습득과 기술이 필요하지만, 화기의 제조에 비해서는 그 수준이 낮았다. 궁시는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상당한 훈련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일단 기술을 익히면 사격 속도와 사거리를 증진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특히 궁시는 훈련 여하에 따라서 적에게 단시간 내에 연속적인 집중 사격이 가능하며, 그 중량이 비교적 가벼워서 개인 행동에 유리하고 매복 작전시에는 기습의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궁시는 여름과 장마철에는 그 탄력이 약해져서 성능이 저하되는 결점이 있었다. (물론 장마철에는 총기류의 위력 또한 저하되었으나 조선에서 주로 사용하던 활인 각궁은 특히 더 습기에 약했다.) 또한 갑주를 착용할 경우에는 살상효과가 현저히 떨어지는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궁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해서 발전하게 되었는데, 양반이나 지배층의 심신 단련뿐 아니라 전 계층의 오락거리로 발전해 여자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궁시를 즐겼다고(...) 한다. 1800년대 말 조선을 탐사한 러시아군 장교는 심지어 아주 어린아이마저 자신들 보다 활을 잘 쏜다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 시대 일반 무기류 중에서 창검류가 차지하는 전술상의 지위는 전체적으로 저하되었지만 근접전에 있어서는 그 기능과 역할은 무시될 수 없었다. 창검류 중에서 창류는 무과 시험에 있어서 궁시류 다음으로 중요한 과목이었기에 전술상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도검류는 병사들의 중요한 휴대 무기였음에도 무과 시험의 과목 대상이 아니라는 현실의 반영이 도검의 제조술과 검술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도검류의 전술적 기능과 위치가 약화 내지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의 주요한 무기 중의 하나이자 도검류 중의 가장 대표적인 무기가 바로 환도였다. 환도는 전통적으로 전술상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그 기능과 위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변화를 모색하였다. 도검류로는 이인검, 삼인검, 사인검, 이진검, 삼진검, 사진검 등의 검과 패검, 운검, 별운검 등의 환도류, 장도 등이 있었다. 창류로는 창, 모, 극, 기창 등이 있었고 궁시류로는 정양궁, 예궁, 목궁, 철궁, 철태궁, 고, 각궁 등의 활과 목전, 철전, 예전, 편전, 동개살, 장군전, 세전, 유엽전, 노 등의 화살이 있었다. 공성무기류로는 차전이 있었다. 보병용과 기병용의 방패가 이런 방패를 든 [[팽배수]]가 조선 초기 주요 병종이었다. 또 철질려가 있었다. 조선의 무기가 자주 묘사되는 사극이나 영화가 인기를 끌수록 당시 무기를 재연하려는 시도도 ADD 주도로 실시된 적이 종종 보인다. 당연히 화약을 다루는 만큼 ADD가 관여돼있으나 재연품을 제작시에 당시의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당시의 설계만을 본딴 현대 소재(...)로 만들어서 재연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이를테면 강철 포신을 만들어서 무연 화약을 썼다는 소리. 다만 이 경우에는 당대 폭발력에 맞게 화약의 양을 줄였고, 현대 기술로 만든 화포라도 당대의 화포처럼 포신이 꽉찰 정도로[* 천자총통의 경우, 격목 넣고 포탄 넣고, 격목 넣고 조란탄 넣고, 또 격목 넣고 포탄을 채우는 식으로(...) 쏘았다. 그만큼 포신이 튼튼했기 때문에 한 짓이라지만...] 탄환을 채우는 실험도 위험하다는 판단에서 하지 않았다. 아무튼 현대의 소재가 너무 좋다 보니, 비격진천뢰의 경우에는 기록된 대로 탄체는 깨지지 않고, 화약과 함께 넣은 철편만 날리고 끝나기도 했다.[* 근데 이렇게 날아간 철편도 바위에 박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